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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ring.

전봇대는 생각하지마.

 


이명박 인수위의 삽질이 연일 점입가경이다. 공식 업무를 시작한지 겨우 한달이 지났을 뿐인데 내가 느끼기에는 지난 5년간을 모두 합친 것보다 더 피곤하고, 더 짜증스럽다. 내놓는 정책마다 심신 미약 상태에서 짜낸 것처럼 하나같이 졸속이고, 그마저도 언론에 살짝 떡밥을 던진 뒤 반발이 거세면 재빨리 주워담는 식으로 갈팡질팡이다. 무엇보다도 아직 취임도 하기 전이라는 사실이 절망스럽다. 아무리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대로 호의적으로 봐주려고 해도, 칭찬할 만한 구석이 단 한 구석도 보이질 않는다. 물론 '조중동문'으로 통칭되는 몰상식 언론들도 바보가 아닌지라 이를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래서 세칭 허니문 기간으로 불리는 취임 전인데도 조선일보와 삼성일보에는 간간이 인수위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를 싣는 파격이 보이기도 한다. 이런 가운데 노무현 국정브리핑 이상의 역할을 수행중인 인수위 대변지 동아일보가 기가막힌 '깜'을 발견했으니, 그게 바로 대불산업공단 '전봇대'다.

이른바 '전봇대의 수난'은 지난 1월 18일 이명박이 규제 개혁 문제와 관련해 전남 대불산업공단에서 겪은 일화를 이야기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명박은 2006년 9월 대불공단을 방문했을 때 보니까 도로에 세워진 전봇대 때문에 화물운송 트럭의 통행이 원활하지 못했다면서, 현지 기업인들이 여러차례 건의를 했지만 철거가 되지 않았고 아직도 철거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에 동아 국정브리핑 일보는 발빠르게 대불공단 현지를 취재했고, 그 전봇대가 정말로 아직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으며 신문 1면에 대문짝만하게 기사화했다. 어느 안전이라고 가만 있겠는가. 어명을 받든 산자부와 한전은 부리나케 철거 작업에 들어갔으며, 불과 이틀만에 두 개의 전봇대가 뽑혀나갔다. 그리고 애꿎은 '전봇대'는 졸지에 '노무현 정권이 심어놓은 온갖 불합리한 규제와 방만한 국정 운영의 상징'으로 각인되었다.

이건 하나의 코미디다. 일단 우습게도 뽑혀나간 전봇대는 이명박이 찍은 그 전봇대가 아니었다고 한다. (관련기사) 엉뚱한 전봇대를 뽑아놓고 '사회 곳곳의 전봇대를 뽑겠다'며 자화자찬한 인수위나, 이를 1면에 또다시 대서특필한 동아 국정브리핑도 가관이지만 임금님이 기침 한번 했다고 부랴부랴 알아서 기어댄 공무원들의 행태는 영구와 땡칠이가 따로 없다. 게다가 막상 이명박에게 전신주 철거를 건의했던 업체 대표들은 '환영'은 커녕 생색내기용 전시행정이라며 불만을 표했다고 한다. (관련기사) 실제 건의한 것은 전신주 및 전선 지중화, 수송에 지장을 초래하는 가로수와 가로등 이설, 교량 하중 보강, 간선도로 일부 구간 중앙분리대 조정 등 네 가지였는데 달랑 엉뚱한 전신주 두 개를 뽑아 놓고 '다 이루었다'며 '심히 보기에 좋았더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전신주를 철거해서 이룬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엉뚱한 자리에 있던 기둥 둘이 사라졌을 뿐, 여전히 블록업체들은 물건을 싣고 지날 때마다 곡예운전을 하거나 전선을 끊었다 다시 잇는 수고를 해야 한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실 이명박식 일처리가 대부분 그렇다. 문제의 근본 원인을 해결하기보다는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 삽시간에 해치우고는 '다 이루었다'고 으스대는 방식. 나중에 찾아올 문제점은 안중에도 없이 즉각적인 효과만을 중시하는 방식. 따라서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번 전봇대 사태는 마땅히 비판의 대상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모든 언론이 하나로 입을 모아 '전봇대'를 합창하고, 진보적이라는 매체에서조차 전봇대 철거에 대한 비판적인 언급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왜 그럴까.



위의 사진을 자세히 살펴보기 바란다. 이번 전봇대 사태와 관련해 가장 발빠르게 움직인 동아 국정브리핑의 1면 사진이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들을 시작으로, 지난 60여년간 한국 언론이 생산한 모든 전봇대 관련 기사를 모두 합한 것보다도 많은 '전봇대 기사'를 양산해냈다. (클릭) 갖다 붙이기도 다양하다. 규제 전봇대, 마음의 전봇대, 전봇대 공직자, 공직사회 전봇대, 우리 곁의 전봇대... 전봇대를 노무현 정권의 부정적인 상징으로 만들고, 이명박을 '불합리한 규제와 비효율적인 행정을 전봇대처럼 뽑아내는' 개혁가로 인식시키려는 의도가 노골적이다. 동아일보는 이 일련의 기사떼를 통해 노무현/이명박, 전봇대/철거, 지지부진/신속, 무능/유능, 불합리/합리, 규제/규제철폐, 반개혁/개혁이라는 '프레임(frame)'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이다. 인수위도 전봇대라는 프레임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깨달은 것 같다. 수시로 전봇대 뽑기를 자화자찬하며, 사회 곳곳에 있는 규제를 전봇대처럼 뽑아버리겠다고 공언한다. 그리고 다른 언론들은 인수위의 이런 발언을 그대로 받아쓰며 동아일보의 프레임 설정에 부지중에 동참한다.

전봇대는 사실 긍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 않은 대상이다. 보통 전봇대는 뻣뻣한 사람, 시야를 가리는 흉물, 가로막는 장벽, 애물단지 같은 부정적 세미오시스(semiosis)를 만들어낸다. 때문에 사람들은 실제 전봇대 철거의 효과나 타당성이 어떻든지간에, 이 부정적 대상이 철거되었다는 정보를 쉽사리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전봇대를 규제나 탁상행정 같은 부정적인 단어들과 연결짓는 고도의 프레임 세팅을 통해 이런 인식은 더욱 강화된다. 이 프레임에 일단 걸려든 사람은, 전봇대와 관련해서 복잡하고 추상적인 사고를 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저 전봇대는 나쁜 것이고, 이를 단숨에 철거하는 이명박은 일 잘하는 대통령이라는 단순화된 사고만이 가능할 뿐이다. 지난 일주일간 언론이 양산해낸 전봇대 관련 기사가 2007년 한 해 동안 나온 전봇대 기사보다 훨씬 많다. 특히 제목에 전봇대란 말이 사용된 사례가 이토록 많았던 적은 한국 역사상 아마도 처음일 것이다. 이게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미디어들은 계속되는 전봇대 기사를 통해 원하든 그렇지 않든간에, 이명박을 전봇대 뽑는 개혁가로 공고히 자리잡도록 돕고 있는 셈이다.

전봇대 프레임은 전봇대를 거론하는 것만으로도 이명박을 도와주는 효과를 낸다. 이건 마치 청계천 복원이 아무리 부정적인 의도로 언급되었어도 긍정적인 이미지를 불러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다. 툭하면 '여의도식 정치를 혐오한다'는 이명박의 말을 기사화하는 언론을 보라. 이명박 자신이 뼛속까지 여의도 정치인이고(그는 국회의원을 지내다 부정부패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인간이다) 어느 여의도 정치인보다도 더 혐오스러운 일을 여러 차례 저지른(국회의원 중에 증인을 해외로 도피시킨 자는 이명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인물임에도 언론들은 그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명박이 여의도 정치인보다 깨끗하다는 이미지를 부지중에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전봇대 기사 역시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전봇대 철거를 이명박의 치적으로 '인정'해야만 성립된다. 때문에 한겨레가 "수도권 규제 '전봇대 뽑기' 지역 균형발전 뿌리 뽑힐라"처럼 전봇대를 부정적으로 언급하는 기사를 써도 대중들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다시 말하자면, 일단 프레임에 걸려든 이상 프레임에 반하는 사고를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해결책이 있을까.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누군가가 코끼리를 생각하는 것을 막으려면 '코끼리는 지금부터 생각하지 마'라고 하는 대신 '코뿔소를 생각해봐'라고 지시해야 한다. 마찬가지다. 청계천이나 전봇대 철거가 아무리 엉터리로 처리된 일이라도, 그걸 부정적으로 기사화하는 것으로는 이미 설정된 프레임을 깨뜨릴 수가 없다. 방법은 이명박의 실패와 부정을 간단하고도 명쾌하게 나타낼 만한 새로운 상징물을 찾는 것, 그래서 모두가 그 프레임에 걸려들게 만드는 것밖에 없다. 하지만 대선 내내 단순하기보단 전문가한테도 어려운 BBK만 언급하기에 바빴던 자칭 진보 개혁 진영의 모습을 보면, 경제에 이어 새롭게 만들어진 전봇대라는 프레임을 과연 깨뜨릴 수 있을지 걱정부터 된다. 그리고 나의 이런 글 역시 사람들이 전봇대를 더욱 생각하게 돕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도... 그러니까, 전봇대는 생각하지 마, 차라리 한반도 대피라미드 같은걸 생각하라니깐.




by 기호태 from mlb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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